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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황비검 19. 제갈세가
셀트소액주주
2015/10/11 14:42 (210.90.***.87)
댓글 4개 조회 1,434 추천 22 반대 3



제갈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택(古宅).

오랜 세월 속에 갖은 풍상(風霜)을 다 겪은 듯 허름해 보였다.

삐걱!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백의경장 차림의 한 사람이 들어왔다.

화창한 대낮인데도 적막할 정도로 집안에 눈에 띠는 사람이 없다.

"누구 없소?"

대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는다.

"기다리고 있었소."

몹시 거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벌써 다 알려졌단 말이오?"

질문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나타날 때가 되었다면…."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꿀꺽!

그도 모르게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제법 크다.

"나타나는 법이 아니겠소!"

빈정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이므로 그의 뒤에 있는 사람은 초절정 고수임에 틀림없다.

"그렇소? 그렇다면 나타날 때는 언제란 말이오?"

그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조만간!"

조만간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질문한 그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흐르고, 다시 빈정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오. 오랜 세월 감춰진 비밀이 껍질을 깨고 세상에 드러날 때가 조만간 도래할 것이오."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음을 알겠소."

지체 없이 뒤에서 느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쥐고 있는 종이가 그 비밀인가?" 

그의 오른손에는 서신처럼 보이는 종이가 쥐어져 있다.

"이것 말이오? 그 비밀과는 상관없는 것이오."

그는 종이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흔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확인해도 문제없겠군. 나에게 넘기시오." 



* * *



우리 일행이 수주를 떠나기 직전, 긴급 서신을 받았다.

흑도연합의 한 축을 담당하는 태양신궁(太陽神宮)의 후기지수(後起之秀)로 흑도연합에서 상당히 촉망받는 오륜마협(五輪魔俠) 방태완(放怠完)이 무림 금기(禁忌) 약물인 오석산(五石散)을 복용했다고 한다. 

이에 태양신궁에서는 오륜마협을 파문축출(破門逐出)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데, 고의냐 과실이냐를 철저히 조사하고 있단다. 

만약 고의성이 입증되면 오륜마협의 단전(丹田)과 주요 대혈(大血)이 파괴되고, 두 팔과 두 다리의 근육이 끊어질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태양신궁의 후기지수가 왜 오석산을 복용했을까 생각해 봤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고, 과연 이번 사건이 강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하고 많은 것 중에서 왜 하필이면 오석산(五石散)일까?

오석산이 과연 개인 문제일까? 그게 아니면 흑도연합의 문제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채수일이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소저, 뭐해요? 다들 기다리잖아요."

수주에서 제갈세가가 있는 양양(襄陽)까지 대략 삼십 리인데, 최단거리로 가려면 그 중간쯤에 자리한 반찰산(半札山) 근처를 지나가야 한다.

반찰산과 그 주변에는 삼나무가 빽빽하게 자랐는데, 산 근처만 가도 삼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서 긴장감을 풀어 주고 평온함을 가져다줬다.

묘시초(卯時初)에 조반(早飯)을 일찍 먹고 수주를 떠났는데, 우리 일행이 반찰산 인근을 지나갈 때 우리 일행 대부분이 향기에 취해서 사륜마차를 타고 가는지 걸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반찰산 어귀를 거의 벗어날 즈음, 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괴성을 질렀다.

푸득! 푸드득!

까악! 까악! 까아아아아악!

처음에는 한 마리였으나 점차 수십 마리 수백 마리로 불어났고,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 같더니 한 지점에서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내 무릎에서 잠을 자던 흑향이 진한 피비린내를 감지했는지 크르릉 소리를 내며 털을 곤두세웠다. 

흑향은 후각과 청각에 강한 자극을 받은 게 분명했다.

까마귀 떼는 마치 그곳에 뭔가 있는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때 채수아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한낱 미물들이 저리 날뛰는지… 아침부터 까마귀 떼가 울부짖는 소리는 기분 나쁘네요. 저만 그런가요?"

"새삼스럽긴..."

채수일이 미처 대답을 마치기 전에 멀리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챙! 채채채챙!

허공에서 불똥이 튀고 요란한 쇳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오더니 비명도 터져 나왔다.

"헉! 누, 누구시오?"

"왜... 이러는 것이오?"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니까!"

"소가주님! 일단 먼저 피하세요!"

"너희를 두고 나 혼자만 피할 수는 없다!"

혈접이 병장기 소리가 나는 곳으로 최대한 빨리 사륜마차를 몰았다. 

채수아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봉황성녀,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요?"

나는 채수아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나도 몰라. 그러니까 가보는 거잖아."

그런데 채수일이 그럴 듯하게 말했다.

"누나, 아무래도 지난번에 미행했다가 놓쳤던 그 자들의 소행 같은데…"

그러자 채수아도 덩달아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나도 채수아의 생각에 동의했다.

"운해비봉, 당연히 그래야겠지." 

우리는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백 장 떨어진 곳에서 남궁세가(南宮世家) 소가주 창궁일검(蒼穹一劒) 남궁호(南宮昊)를 포함한 남궁세가 다섯 명이 흑의복면인 이십여 명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의 현장을 보니까, 생각만큼 심각한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사방으로 선혈이 튄 것도 사망자가 발생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챙! 채앵! 챙! 챙!

"죽어라!"

"비켜라!"

"어딜!"

"얍!"

서로 뒤엉켜서 내지르는 비명과 살기(殺氣)가 충만한 반면에, 시간이 지날수록 병장기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건 평화로운 소강상태가 아니라 어딘지 불편함이 강요된 소강상태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점차 가까이 접근하고 있어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확인한 채 씨 남매의 태도가 대번에 돌변했다.

"봉황성녀, 그냥 지나가죠. 보니까 다들 괜찮네요. 누가 감히 남궁세가를 무시하겠어요?"

"소저,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골치 아픈 것들을 연달아 구경했거든요."

아직도 두 사람은 남궁세가와 얽힌 악연의 고리를 끊지 못했나 보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는 안 돼.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해."

우리 일행이 타고 있는 사륜마차가 오십 장쯤 다가가자 흑의복면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제각각 신법을 펼쳐 사라져 버렸다. 

휙! 휙! 휘이익!

"적들이 물러갔다!"

"우리가 이겼다!"

네 명의 호위무사들이 좋아하고 있을 때, 창궁일검이 큰소리로 외쳤다.

"흩어진 말을 찾아라!"

그제야 창궁일검의 호위무사 네 명은 명문세가의 무사답게 소가주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여기 저기 흩어진 말을 찾으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창궁일검은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흑혈접은 그렇게 서 있는 창궁일검 가까운 곳에 사륜마차를 세우더니, 창궁일검을 향하여 짧게 물었다.

"괜찮소?"

그러자 창궁일검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흑혈접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크게 다친 곳이 없소."

흑혈접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이오. 우리가 따로 도울 일은 없겠소?"

창궁일검은 흑혈접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 듯하오."

채수일은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 풍운일검(風雲一劒)과 대결 이후에도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듯 창궁일검 소가주를 보고도 본체만체했다. 

"그냥 빨리 가죠? 제갈세가… 그리 멀지 않은데!"

채수일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것은 채수아 역시 크게 차이가 없었는데, 오히려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 역시 채수일의 영향을 받아서 그다지 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채수아에게 말했다.

"운해비봉, 기왕에 마주친 김에 말이라도 나누는 게 어떨까 싶은데..."

"하든지 말든지..."

"사람이 말을 하는데 이것 참!"

"꼭 대답이 필요한 건 아니죠. 완전 재수 없어."

"운해비봉! 그렇다고 나에게 재수 없다는 말까지..."

"내가 언제 봉황성녀께 재수 없다고 했나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게 속마음이 아닐 수도 있잖아. 특별히 좀 봐주면 안 돼?"  

"뭘 봐줘요? 못 볼 걸 봐서 그런지 눈이 썩어버릴 것 같네요. 안구정화 차원에서 그냥 가자고요. 제! 발!"

"다른 건 몰라도 누나가 일관성 하나는 끝내줘. 후후."

"자신은 조그만 상처에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난리를 치면서, 정작 그것으로 인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져 버릴 수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 싫어한다고요!"

"운해비봉, 나도 그런 부류의 인간은 정말 싫어. 자기 앞에서 거치적거린다고 무조건 짓밟고 나가는 자들, 좋아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운해비봉도 이번 기회에 버릴 것은 버리고 잊을 것은 잊으라고."

마차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일부 흘러내린 채수아의 긴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채수아는 머리카락을 잡더니 신경질적으로 말아 올려서 비녀를 꼽았다.

채수아의 돌발적인 행동에 나는 왠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불과 얼마 전에 바람에 휘날리던 채수아의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머리카락이 비수(匕首)처럼 깊은 상처를 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어떤 말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멍하니 채수아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채수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눈이 아파서요. 마음 놓고 햇빛을 쳐다봤더니 눈이 아려오네요."

"으음, 진기를 다 풀어놓은 거야?"

"네. 그냥 자연을 느끼고 싶어서..."

"그렇구나. 뭐? 자연을 느끼고 싶다고? 언제부터 그런 거야?"

"왜 그렇게 놀라요? 자연을 느끼고 싶다니까..."

"그리고?"

"뭐가 그리고...라는 거죠?"

"혹시 다른 문제 같은 게 있냐고!"

"문제가 꼭 있어야 하나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연을 느끼고 싶다는 거 말고, 또 다른 거 느끼는 게 있냔 말이지."

"글쎄요, 지금은 그냥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을 뿐이네요."

"혹시 다음에라도 다른 게 느껴지면 꼭 말해줘. 잊지 말고!"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내려오는 햇살이 이렇게 따갑게 느껴질 때가 있었던가.

나는 지그시 채수아의 가녀린 손을 잡았고,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 왔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서라, 아서라.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일어날 일이라면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 아니던가. 기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괜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채수아가 저렇게 원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마음속으로 자조(自嘲)한 다음에, 혈접에게 떠나자고 말했다. 

가만히 나에게 손을 맡긴 채수아는 이윽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그 직후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마부석에서 들려오는 게 아닌가.

"허허허."

흑혈접이 크게 웃더니, 미련 없이 제갈세가 쪽으로 사륜마차를 천천히 몰았다.

도와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돕겠다고 나서는 것도 모양 빠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혈접의 성격으로도 남을 돕는 게 아직은 어색했을 것이다.  

휘이이이이잉...!

사륜마차가 지나간 자국을 지워 버리려는 것 같은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 이것은 사륜마차가 떠난 뒤에 불고 있는 바람이었다.

 


* * * 



"그동안 잘 계셨죠?"

나이가 열다섯 아래로 보이는 소년이 인사를 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장원(莊園)을 호위하는 건장한 무사가 그 소년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소년은 품에서 봉투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총관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무덤덤하게 한 마디를 더했다.

"얼른 전해주고 나와라."

소년도 익숙한 듯 짧게 대답했다.

"네."

'시간도 없는데 호위 무사에게 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빠른 걸음으로 총관실로 갔다.

턱!

총관실 앞에서 낯선 사람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소년은 먼저 사과하며, 총관실 앞에서 멈춰 섰다.

"총관님! 총관님!"

소년은 봉투를 전해주려고 총관을 불렀다. 

그런데 총관실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라! 총관님이 안 계시나?"

소년은 당황했다.

혹시 몰라서 좀 더 크게 불렀다.

"총관니이이이임!"

역시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소년은 문 밑으로 봉투를 넣을까 하다가 총관에게 직접 전달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책상 위에 놓아둘 요량으로 총관실 문을 열였다. 

문을 열자 비릿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고개를 살짝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총관실은 온통 피바다였다.

엎드린 채 등에 칼을 꽂고 있는 누군가를 봤다. 

"우웩!"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살인 현장을 목격했음을 깨달았다.

즉시 총관실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이 죽었단 말이에요!"



* * *



호북성(湖北省) 북부에 위치한 양양을 지나는 한수(漢水)는 수로맹의 무창까지 연결되어 있고, 무창을 지나는 장강(長江)은 항주까지 연결되어 황해로 빠져나간다. 

그만큼 양양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인데, 그곳의 용중산(隆中山)에는 오래된 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이름은 제갈세가(諸葛世家)! 

기문진법(奇門陣法)과 역리(易理) 그리고 토목기관(土木機關)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不朽)의 가문으로서, 무림오대세가(武林五大世家)에 포함되어 있었다. 

촉한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을 선조로 모시는 제갈세가는 특히 신기제갈가(神機諸葛家)로 더욱 유명했다. 



오늘은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로 강호에 널리 알려진 만박성화(萬博聖花) 제갈혜(諸葛彗)의 열아홉 번째 생일이자, 비공식적인 무림 후기지수의 모임이 있는 날이다.

원래는 무림오화(武林五花) 중에서 네 명이 간소한 모임으로 하려고 했지만, 사화(四花)를 동경하는 수많은 후기지수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 공식적인 후기지수의 모임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세가에서는 이날을 대비하여 닷새 전부터 별채 하나를 통째로 비워둠으로써, 후기지수들이 편안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제갈세가에 도착한 것은 사시(巳時)였는데, 이는 예정보다 두 시진 빨리 도착한 것이었다.

제갈세가라는 오래된 현판이 걸려 있는 대문 앞은 그야말로 강호인뿐만 아니라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이 기회에 한몫 챙기려는 장사꾼, 구경하려고 모여든 마을 아이들까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사륜마차는 제갈세가의 사람이 잘 보관하겠다며 어디론가 몰고 갔다.

채수아는 정문을 지키는 위사에게 배접(褙貼)을 전했고, 일다경(一茶頃)쯤 지나서 훤칠하게 큰 키를 가진 청년이 정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운해비봉(雲海飛鳳) 채 소저! 저는 제갈세가의 서기(書記)를 맡고 있는 제갈세중(諸葛勢重)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별채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와 함께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별채로 가는 도중에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얍!"

"이얏!"

원래 다른 사람의 무공 수련은 절대로 봐서는 안 되는 금기였는데, 제가세가의 무사들은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삼십 명 이상의 무사들이 기합(氣合)을 지르는데, 마치 한 사람이 내는 것처럼 통일되어 있었다. 

기합과 더불어 동작 하나 하나에도 명문세가의 무사들답게 패기(覇氣)와 절도(節度)가 묻어났다.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반면에, 채수아와 채수일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나머지 일행들은 소 닭 보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제갈세가 측에서 수련 장면을 공개한 것은 경호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의도와 더불어 제갈세가가 세간의 소문처럼 다른 세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력(武力)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별채에 배정된 방문 앞까지 안내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운해비봉 채 소저께서는 저희 소군주님을 만나러 저와 같이 가시고, 나머지 일행은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채수아는 만박성화 제갈혜를 만난다는 기쁨에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제갈세가 서기를 따라갔다. 

채수아와 서기가 떠난 후, 우리 일행은 간이침상과 탁자와 의자가 단출하게 놓여 있는 육인실(六人室)에 들어가서 운기조식을 하며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광검 할아범이 느닷없이 나에게 말했다.

"아기씨, 다 늙은 제가 무림사화를 봐서 뭐 하겠습니까? 잠시 개인적인 볼 일이 있습니다만!"

할아범이 굳이 참석하기 싫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었다.

"할아범, 그러면 할아범은 따로 개인적인 시간을 갖도록 해."



신시(申時)가 되자 드디어 후기지수 모임과 함께 생일잔치가 시작되었다.

제갈세가 연무장에 마련된 연단 중앙에는 사화(四花)가 자리했고, 배첩을 받은 많은 후기지수들이 제갈세가 연무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마련된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서로 인사하기 바빴다.

우리 일행은 지정된 탁자에 가서 앉은 다음,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운 후에 술을 마셨다. 

물론 남궁세가의 소가주 창궁일검을 포함한 무림 후기지수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서 떠들고 있었다. 

솔직히 우리 일행은 무림 후기지수와의 만남이 그렇게 달갑지는 않아서, 우리끼리 먹고 마셨다. 

가끔 몇몇 후기지수들이 다가오기도 했지만, 남궁세가와의 불협화음 때문에 대부분은 우리를 꺼리고 있음이 역력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채수일도 그런 분위기를 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파악했는지 그저 먹고 마실 뿐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어떤 중년인이 연단 위로 올라가더니 참석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를 주목해 주십시오. 저는 제갈세가의 총관 제갈진산(諸葛辰算)이라고 합니다. 먼저 무림사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단상을 보시면 저와 제일 가깝게 앉은 분이 운해비봉(雲海飛鳳) 채수아(蔡秀娥) 소저, 그 옆으로 선의약왕(仙醫藥王) 조경주(趙暻珠) 소저, 태극성녀(太極聖女) 장소련(張素蓮) 소저, 그리고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만박성화(萬博聖花) 제갈혜(諸葛彗) 소저이십니다."

총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화와 같은 환호와 더불어 각종 찬사가 일제히 터졌다.

"우와!"

"해어화(解語花)로다!"

"천상의 선녀처럼 아름답소이다!"

잠시 뜸을 들인 후에 총관이 계속 말했다.

"여러분 모두가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과 술이 마련되었으니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운해비봉 채 소저께서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모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

왜 갑자기 채수아가 나서는 것인지 나는 물론이요 다른 일행들 모두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단 위의 채수아가 다소곳하게 일어서더니, 연무장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저는 무림오화 중의 운해비봉 채수아라고 해요.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수로맹 소속이죠. 제 남동생도 함께 참석했는데, 제 남동생이 여러분의 흥취(興趣)를 위해서 칼춤을 선보인다고 하네요."

채수아의 말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짝! 짝! 짝!

일부 후기지수들은 성원의 함성도 보냈지만, 전반적으로는 정사지간(正邪之間)에 속하는 수로맹을 무시하는 언사가 대부분이었다.

"수로맹 출신인데 제대로 하겠냐?"

"수로맹에서 어떻게 키웠는지 한 번 보자!"

"운해비룡(雲海飛龍)의 실력이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무술 시범을 하게 된 채수일은 그야말로 벌레 씹은 얼굴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왜 누나는 자기 동생에게 무술 시범을 빙자해서 칼춤을 추게 만들었을까?’

채수일은 잠시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생각을 접어야 했다.

채수아로부터 지목을 당한 채수일은 술잔에 남은 술을 마저 비우더니 그대로 일어서서 연단으로 올라갔다.

"후읍!"

깊은 숨을 들이마신 채수일은 포권을 공손히 취한 다음에, 검집에서 오른손으로 검을 천천히 뽑더니 천강도법의 아홉 번째 초식 노룡토화(怒龍吐火)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다.

"헛! 저건 천강도법의 제구식이잖아."

내가 놀라서 소리쳤다.

설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무공에 욕심이 많더니, 채수일이 가전무공인 천강도법을 검법으로 변환하여 남몰래 익혔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채수일을 바라봤다.

설화가 전음으로 나에게 몰래 말했다.

'봉황성녀님, 운해비룡이 달마어검탁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가전무공을 시전하려나 봐요.'

나는 설화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때 채수일이 움켜쥔 청강검에서 금빛 검강이 무려 석 자나 뻗어 나왔다.

"우와!"

검강을 바라본 참석자들은 환호를 하더니, 일순 숨을 죽이고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채수일을 바라봤다.  

드디어 일도단천(一刀斷天)하려는 자세에서 우렁찬 포효(咆哮)가 터졌다.

"이얏!"

일척(一尺) 크기의 황금빛 검환(劍丸) 두 개가 쑤욱 하고 도끝에서 차례로 빠져 나오더니, 하늘을 향해 백 장 높이까지 순식간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맹렬하게 황금빛을 발산하며 회전하다가 어느 순간 허공에서 일시 정지하더니 갑자기 두 개의 검환이 서로 충돌하였다.

두 개의 검환이 충돌하자 가늠할 수 없는 굉음과 함께 엄청나게 눈부신 황금빛 광채가 제갈세가 일대를 환하게 뒤덮었다. 

연무장에서 비교적 내력(內力)이 약한 사람들은 입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은 내공으로 호신기공(護身氣功)을 펼쳐 쓰러지는 불상사를 막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부 장기가 상할 정도로 내상을 입은 자도 속출하였다.    

잠시 후 소란이 가라앉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우와!" 

약간 무리를 했는지 채수일의 얼굴이 조금 파래졌지만, 금방 원래대로 혈색이 돌아왔다. 

채수일의 놀라운 무술 시범 때문인지 채수일 다음으로 무술 시범을 하겠다는 자원자는 아무도 없었다. 

채수일의 시범을 지켜본 대다수의 후기지수들이 의외로 충격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수로맹 출신의 열여섯 나이에 벌써 검환을 발출하여 마음대로 조종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으니, 그 놀라움이 대단했던 것이다.

오늘 후기지수의 모임의 주인공은 무림사화가 아닌 단연코 채수일이었다!

수로맹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냉대를 받았던 채수일은 무술 시범에서 검환을 선보인 덕분에 일약 후기지수 중의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오륜마협 방태완은 지고, 운해비룡 채수일이 떴다. 

채수일과 같은 십육 세는 물론이요, 한두 살 차이가 나는 여협들까지 채수일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강호무림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강한 무공을 지닌 남자가 여협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일순간에 채수일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의 주인공이 되었고, 자신에게 뜻하지 않는 관심이 쏠리자 채수일은 오히려 대인기피증까지 생겨날 지경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렸다는 것이다. 

내가 채수일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위로(慰勞)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불쌍한 소협, 운해비봉 때문에 이게 뭐람!"



* * *



살인 현장을 목격한 소년은 눈을 가린 채 장원의 심처(深處)로 끌려갔다. 

끌려가기 직전에 몸수색을 철저하게 당했다.

알 수 없는 방에 끌려간 소년은 비로소 방안을 볼 수 있었다.

탁자 하나에 의자 몇 개가 전부인 스산한 방.

"거기 앉아!"

공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목소리로 거친 사내가 말했다.

"네."

소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소년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자, 겁먹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해 보자. 알겠지?"

소년은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대문에서 총관실까지 가는 동안에 평소와 다른 뭔가를 본 게 있었어?"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가 다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총관실 근처에서 낯선 사람과 부딪쳤습니다." 

소년은 비로소 안심하는 듯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흠..."

삐걱!

방문이 열리더니 삼십대 무사가 사내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다시 나갔다.

"네가 부딪친 사람은 총관을 보좌하기 위해서 어제 새로 들어온 총관의 조카라고 한다."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네가 헷갈릴지 몰라서 알려주는 건데, 네가 목격한 시신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다."

사내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봐. 뭐 도움 될 만한 다른 거 없어?"

소년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전혀 없는데요." 

더 이상 소년에게서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눈을 가린 채 소년을 밖으로 내보냈다. 

소년이 장원을 벗어나서 좁은 길을 걷고 있을 때, 처음 보는 무림인이 말을 걸어왔다.

"잠깐만!"

갑작스러운 소리에 소년은 그 사람을 쳐다봤다.

"네? 저 말인가요?"

무림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 줄 수 있을까?"

소년은 일순 당황했지만, 지은 죄가 없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는 것은 전부 말해줄 수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림인이 말했다.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

소년은 내심 속으로 놀랐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누구세요?"

무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무림인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나는 그 장원의 주인이다."

소년은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림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쫓기고 있는 중이다. 더는 묻지도 말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 목격한 현장을 말해봐라. 너에겐 아무 해도 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소년은 목격한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들려주었다.

"장원 안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따로 들은 거 없어?"

소년은 아는 대로 다 말해줬다.

그때 갑자기 복면인 다섯 명이 나타나더니, 소년과 무림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무림인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복면인들에게 말했다.

"그분들과 관련 있소?"

복면인 중의 한 명이 대답했다.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소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이 알든 모르든 무림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수천 년 동안 유지된 조직인데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무림인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거침없었다.

"오호! 그 녀석이 그런 것까지 누설했다니 놀랍군. 그렇다면 더 이상 살려둘 필요가 없겠지."

그 말이 끝나자 나머지 네 명이 소년과 무림인을 죽이려고 칼을 높게 들었다.

소년은 이제 죽었구나 싶어서 눈을 감았다.

챙! 챙챙! 챙챙!

금속성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소년은 살며시 눈을 떴다.

소년 앞에는 어느새 노인 한 명이 복면인 다섯 명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복면인 세 명은 중상을 입었는지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둔했고, 복면인 두 명은 그나마 경상을 입은 상태였다. 

노인임에도 복면인 다섯과 대결에서 저런 무위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소년은 안심이 되었다.

"휴우! 이제 목숨을 건진 셈인가?"

무림인이 소년에게 전음을 보냈다.

'다섯 복면인이나 노인은 내 능력 밖의 사람들이다. 이 기회에 우리는 도망가야 한다.'

무림인은 말을 끝내자 소년의 허리를 잡더니 허공으로 솟구쳤다. 

소년은 무림인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소년은 도망치는 중에도 복면인과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옆에 있는 무림인에게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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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andthink 10.11 16:16 (106.243.***.179)
궁금해~ 궁금해~ 으~ 마약보다 더 심각한 중독인듯요^^
셀옹처럼 10.11 16:22 (39.119.***.242)
점점 구도가 복잡해져서 가계도를 그려봐야 할 듯하네요. 오늘도 잘 봤습니다.
BobYu 10.11 18:31 (1.248.***.208)
"나타날 때가 되었다면…. 나타나는 법이 아니겠소!"
swelldom2012 10.11 18:36 (118.46.***.52)
휴일인데 연재해주셨네요^^
사실 궁금해서 어제부터 몇번 확인 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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