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4세기, 프라겔라(Pragela)와 도피니(Dauphiny)에 살던 수많은 왈덴스들(Waldense)들이 칼라브리아로 이주해 와서 그 나라 귀족들의 허락을 받아 몇몇 불모지에 정착했다. 그들은 근면하기 이를 데 없는 노력으로 땅을 일구었고, 그 결과 그들은 얼마 안있어 몇몇 거친 불모의 땅덩이들을 신록이 우거진 옥토의 아름다움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켜 놓았다.
칼라브리아의 영주들은 그들의 새 백성들과 소작인들로 인해 크게 만족스러워 했는데, 이는 그들이 정직했고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주교들은 입장이 달랐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몇 가지 부정적인 불만 사항들을 제시하긴 했으나 그들이 저질렀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나쁜 일로도 그들을 고소할 수 없는지라, 그들이 정말로 하지 않은 다음과 같은 일들로 고소거리를 삼아 그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로마카톨릭 교도가 아니다.
그들의 어떤 사내아이도 주교로 키우지 않는다.
그들의 어떤 여자아이도 수녀로 만들지 않는다.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밀초를 제물로 해서 그들의 주교들에게 바치지 않는다.
순례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형상들에 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리브리안의 영주들은 이 사람들은 어디에 내놔도 해가 될 게 없고, 로마카톨릭 교도들의 감정을 해칠 만한 일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이 자국에 옴으로써 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주교들에게 낸 십일조로 인해 주교들의 총수입이 눈에 띄게 증가했으니, 주교들이야말로 그들에 대해 불평을 터뜨릴 수 없는 사람들 아니냐는 식으로 반문하며 주교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주변 일들이 그런대로 몇 년 동안 순탄히 돌아갔으며, 그 기간 동안 왈덴스들은 그들 스스로를 두 개의 통합된 도시로 만들어 대여섯 개의 마을을 그들의 관할 구역에 병합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한 도시당 한 명씩 설교자를 둘 목적으로 제네바(Geneva)에 사람을 보내 두 명의 목사를 데려오도록 했으니, 그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이 일에 대한 정보가 교황 피우스 4세(Pius the Fourth)에게 전달되자, 그는 그들을 칼리브리아에서 뿌리 뽑기로 마음을 다졌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기질이 매우 과격할 뿐 아니라, 종교적 편협성이 하늘을 찌를 듯한 추기경 알렉산드리노(Alexandrino)를 두 명의 승려들과 함께 칼리브리아로 보냈고, 그들로 하여금 거기서 심문관 노릇을 하도록 했다. 권한을 부여 받은 이 사람들은 왈덴스들이 세운 도시 중 하나인 성 자이스트(St. Xist)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민들을 모아 놓고서 그들이 만약 교황이 지명한 설교자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떠한 상해도 입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시에는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동시에 잃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놓았으며, 자신들이 뜻하는 바를 알릴 수 있도록 그날 오후에 미사가 공개적으로 치러져야 하니 그들도 거기에 참석하라는 말로 일단락을 맺었다.
하나 성 자이스트의 사람들은 미사에 참석하는 대신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숲으로 도주했는지라, 추기경과 그의 보좌 신부들의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그러자 추기경은 왈덴스들에게 속한 다른 도시인 라 가르드(La Garde)로 달려가서는 그곳에서만큼은 성 자이스트에서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 성읍 문들을 걸어 잠그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든 대로에 경비병들을 배치토록 조치를 취했다. 이전에 성 자이스트에서 그랬던 것과 동일한 제안이 그후 라 가르드의 거주민들에게도 주어졌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별도의 계락이 덧붙여졌다. 즉 추기경은 성 자이스트의 거주자들이 그의 제안에 지체없이 응해 주어 교황이 자신들에게 설교자를 임명해 주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고 말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던 것이다. 추기경이 그들에게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 라 가르드의 거주민들은 그들의 형제들인 성 자이스트의 선례를 즉각적으로 따르겠다고 말했고, 따라서 이 전략은 그대로 먹혀 들어가고 말았다.
한 도시의 사람들을 속여서 목적을 달성한 추기경은 다른 도시민들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성 자이스트의 거주자들을 야생 짐승처럼 추적하여 잡기 위해 병사들을 숲속으로 출동시켰고, 그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이는 즉시 모두 살해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군대는 숲으로 들어갔으며, 그들의 작전에 대한 정보가 채 도달하기도 전에 수많은 왈덴스들이 그들의 포악함의 먹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가능한 한 가치있게 바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고, 그후 있은 몇 차례의 교전에서 어설프게 무장한 왈덴스들이 놀라운 용맹을 발휘하는 바람에 전투 도중 쓰러지는 이들이 양측에서 속출하게 되었다. 태반의 병사들이 여러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자, 잔류병들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울화통이 터진 추기경은 나폴리(Naples)의 총독에게 서한을 띄워 병력을 보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총독은 그 즉시 명령을 내려 나폴리 전역에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발표토록 했다. 즉 모든 범죄자들과 탈영병, 여타 추방자들은 그들 각각의 범죄 사실을 틀림없이 용서받을 것인데, 단지 성 자이스트 거민들을 대항해 출병하여 그들을 몰살할 때까지 계속해서 무장하고 있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운명에 빠져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포고에 응해 왔다. 그들은 경무장한 중대로 조직되어 숲으로 파병되었으며, 마주치는 모든 개혁 신앙인들을 죽이기 위해 숲속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총독 자신도 정규군의 선두에 서서 추기경과 합류했고, 그들은 숲에 숨어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동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은 잡아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가지들을 잘라 그들을 불태웠는가 하면, 그들을 발가벗겨 그들의 몸을 야수들이나 육식 조류들이 먹어 치우도록 방치해 두기도 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먼 곳에서 저격했지만, 태반의 사람들은 재미 삼아 요리조리 추적하여 잡았으며, 그나마 동굴 속에 피신한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은신처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다 죽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 모든 가엾은 희생자들은 다양한 수단으로 죽임을 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무자비한 박해자들의 편협한 악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 된 것이었다.
성 자이스트의 거주자들이 몰살당하자마자, 라 가르드의 거민들은 추기경과 총독의 호의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로마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인다면 그들 자신과 가족들이 해를 당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의 집과 재산이 회복될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지만, 반대로 그들이 이러한 자비를 거절할 시엔, (말해진 그대로 옮기자면) 극단적인 수단이 사용되어 잔인하기 짝없는 죽음이 그들이 불응한 결과로 주어질 것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약속과 위협의 기로 위에서 신변의 안전을 고려할 수도 있었지만, 이 고결한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기를, 다시 말해 로마카톨릭의 오류를 받아들이기를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이로 인해 너무도 분통이 터져 하던 추기경과 총독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그들 중 30명을 즉각 고문대에 올려 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문대에 눕혀진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이 어찌나 지독하던지 그 중 몇 명이 고문을 받다 숨지고 말았다. 특히 샤를랭(Charlin)이라는 사람은 너무도 잔악하게 다루어졌는지라, 그의 복부가 터져 창자가 밖으로 빠져 나오는 바람에 격렬한 고통 속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문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이들과 고문을 맛보지 않은 이들이 그들의 믿음에 있어서 동일한 지조를 지키고, 또 몸에 어떤 고문이 가해지거나 마음에 어떠한 두려움에 일어난다 해도 그것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 즉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자신들을 설득시킬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천명하는지라, 이 극악무도한 행위들은 애당초 그들이 의도했던 목적에 해답을 던져 주지 못했다.
그러자 몇 사람이 추기경의 지시에 따라 완전히 발가벗겨져 쇠몽둥이로 얻어 맞아 죽었다. 어떤 이들은 서슬 퍼런 큰 칼로 갈기갈기 난도질당했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높은 탑 꼭대기에서 밑으로 던져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역청을 뒤집어 쓰고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
추기경을 수행하던 한 승려는 천성적으로 흉악하고 잔인한 기질을 타고난지라 자신의 손으로 이 불쌍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해 달라며 그에게 부탁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이 짐승 같은 사내는 커다랗고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고서 마치 푸줏간 주인이 수많은 양들을 잡는 것처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80명이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이 시체들을 일일이 4등분하여 찢겨진 것들을 각각 화형대 위에 고정하고, 그것들을 주변 30마일 이내의 그 나라 여러 지역들에 박아 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4명의 라 가르드 주요 인사들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목사는 자신의 교회 첨탑 꼭대기에서 내던져졌다. 그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짓이겨졌으나 그 추락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이때 그 옆을 지나치던 총독이 이렇게 말했다. “그 개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느냐? 놈을 일으켜 세워 돼지들에게 던져 주거라.” 잔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60명의 여인들은 그들의 사지가 너무도 거세게 잡아당겨지는 바람에 그들의 팔다리에 묶여 있던 끈들이 살을 뚫고 들어가 뼈까지 조여지게 되었다. 감옥에 재구류되었을 때 그들의 상처는 썩기 시작했고, 그들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죽어 갔다. 다른 많은 이들도 여러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으며, 그나마 다른 나머지보다도 동정심이 많은 어떤 로마카톨릭 교도가 단 한 명의 개혁 신앙인이라도 그를 위해 중재하고 나서면, 그 또한 그 자리서 붙들려 이단에 호의를 베푼 자로서 동일한 운명에 처해졌다.
그를 필요로 하는 어떤 당면 문제로 인해 총독은 나폴리로 회군할 수밖에 없게 되고, 추기경 또한 로마로 다시 부름을 받자, 그들이 시작했던 일에 마무리 일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뷰탄 후작(marquis of Butane)에게 떨어졌다. 결국 그는 이 일을 짐승같이 가혹하게 시행했고, 칼라브리아 전 지역에 살고 있던 개혁 신앙인들 중 단 한 사람도 남겨지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악의 없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기고, 재산을 도둑 맞고, 자신들의 집에서 내몰리며 각색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단지 그들의 양심을 다른 이들의 미신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증오하는 우상의 교리들을 포용하려 하지 않고,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교사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폭정은 세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대상 인물을 노예화하고, 그것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것은 규정된 것을 그의 지성에 무조건 강요한다. 첫 두 종류는 국가적 폭정이라 이름지어질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시대에 있어 독재적인 군주들에 의해 지금껏 자행되어 왔으며, 그들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불행한 피지배자들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일을 즐겨 왔다. 그러나 세 번째 종류, 즉 규정된 것을 피해 지성에게 무조건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폭정이라 이름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다른 두 종류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에 폭정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종류로 손꼽힌다. 이유인즉 로마의 성직자들은 신체에 고문을 가하고 그들이 박해하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함은 물론, 그들의 생명을 빼앗고, 정신에 고통을 가하고, 가능하다면 불행한 희생자들의 혼을 압제하려 들기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