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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를 대적하라
Divergence
2006/11/27 08:21 (58.22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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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7에는『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고 되어 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당면하는 가장 주요 과제이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영적 전쟁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눈에 보이는 전쟁과 달리 영적 세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전쟁이기에, 무감각한 사람들에게는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다고 이 전쟁이 일생에 한 번 치러지고 마는 통과 의례 같은 것도 아니다. 한번 끝나면 또 다른 전쟁이 오고,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양상으로 마귀는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란 그 육체를 벗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적 전쟁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적 전쟁, 특별히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야고보서 4:7에서 제시한 대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대로 “마귀야 물러가라.”하고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말씀으로 물리치라니까, 마귀가 공격해오는 것같으면 성경을 마구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과연 마귀는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하고, 성도들은 어떻게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가?

구원받은 성도에게 맨 처음 다가오는 마귀의 공격은 그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제거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 할 때 어떻게 해서든 그 길을 막으려는 것이 더 크겠지만, 일단 구원을 받고 나면 구원은 절대로 취소될 수 없기에 더 이상 그 일로는 공격하지 못하고, 대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접기도를 하고 집에 간 후, “아까 내가 뭐 한거지? 쓸데 없는 일을 했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죄를 짓게 한 후 “그렇게 죄를 짓는 놈이 무슨 구원을 받았다고 그래?”라고 말하기도 하며,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거짓 교리를 주입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빼앗아 간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마귀 자신과 싸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자기의 수하였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편이 되어 자기와 싸우게 되었으니, 마귀가 할 일은 그로 하여금 전의(戰意)를 상실케 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구원받지 못하면 마귀와 싸울 수가 없다. 구원받은 성도만이 마귀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가 자신을 마귀의 대적이라고 여길 수 없다면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구원에 대한 의심이 들 때, 그것은 바로 마귀의 공격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성도가 갖춰야 할 것은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물론 자신이 정말 구원받았는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세례받았다고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창세 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은사 체험이나 또는 어떤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라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셔서 내 모든 죄를 다 씻으신 것을 믿고, 그분을 정말로 구주로 영접했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구원을 확신해야 한다. 이렇게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렇게 영접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요 1:12). 더 이상의 의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고, 여기서 지면 마귀에게 패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이렇게 공격해 올 때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즉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대적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17에서 구원의 “투구”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탄이 쓰는 고전적인 방법 중에 하나는 성도에게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죄라는 것은 어떠한 박해보다도 강력하여 위대한 성도들마저도 쓰러뜨린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마귀와의 영적 전쟁의 측면으로 볼 때, 그것은 성도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사탄의 전략이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마귀는 죄를 지은 성도에게 죄책감 가운데 무기력하게 앉아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마귀가 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주님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그는 완전히 칼을 놓고, 발목이 끊긴 병사처럼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앉아 있기만 할 뿐이다. 그는 완전히 패잔병이 된다. 사탄은 고소자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나타나 “너는 죄인이야. 그런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구? 이 위선자 같으니라구...” 하면서 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여기에다 징계라도 받게되면, 마귀가 주는 무기력은 더욱 심해진다.
이때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하는 것이다. 마귀가 죄를 지적하면 그 죄를 인정하라. 하지만 이것은 마귀에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성경은 “죄의 자백”이라 말한다(요일 1:9). 그리고는 나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졌음을 믿으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사탄 앞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셨다. 나의 모든 죄들은 그분의 피로 씻겨졌다. 나는 죄를 자백했고, 주님은 나를 받아주셨다.” 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할 때 그리스도의 피를 주장하는 이유는, 마귀는 이미 그 피 앞에서 한 번 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패했지만 그 패배를 인정치 않고, 성도들에게도 그 사실을 가려 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주장하는 것은 마귀의 패배를 다시 한번 선언하는 것이고, 그 패배자로 하여금 나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분명히 하는 것인데,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나를 구속하셨기 때문이다(골 1:14).
나는 보혈을 주장함으로써 사탄이 주는 모든 무기력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은 곧 다시 힘을 얻어 일어서서 무장하고 마귀와 싸울 수 있는 군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도『그러므로 맥없이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절뚝거리는 다리로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고 말씀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큰 무기가 된다. 우리는 심지어 마귀가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함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는 자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세우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마귀의 전형적인 공격 중 또 하나는 박해이다. 우리는 옛 로마 제국이 성도들을 박해하여 콜로세움에서 사자 밥이 되게 했던 사건을 잘 안다. 중세 시대에 종교재판소의 불길 가운데서 한 줌 재로 변한 수많은 성도들도 있다. 공산권에서나 회교권에서의 박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큰 박해는 없을지라도,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 각 구성원들 가운데서 여전히 박해를 받고 있다. 이는 성도들의 믿음을 말살시키기 위한 마귀의 공격이다. 구원을 의심시킨다든지 죄로 무기력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내적인 공격임에 반해, 박해는 외적인 공격이다. “영적” 전쟁이라 해서 피상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공격이다.
이것은 성도 각인에 대한 공격도 있고, 지역 교회에 대한 공격일 수도 있다. 지역 교회의 경우에는, 국가가 직접 탄압하지 않더라도 교단들이 합세하여 이단이라고 매도한다든지, 교회법들을 통해 그 교회가 사역을 하지 못하게 묶어 버린다든지, 교인들을 선동해 그 교회를 대적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등 수많은 방법으로 공격하는데, 이런 마귀의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고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 마귀를 대적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우리의 물리적인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기도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박해에 대해서는 기도 이외에 더 확실한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지혜롭고 힘있는 사람이 의지를 굳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한 지체가 무릎꿇고 드리는 기도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의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통해서 응답해 주시기도 하고, 지혜를 주셔서 그 공격들을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시기도 한다. 이러한 지혜들을 통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여러 가지 공격들이 무산되기도 한다.
주의할 점은, 이같이 박해라는 마귀의 공격에 대해서는 이 박해가 사라지는 것만이 기도의 응답이거나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별히 개인에 대한 박해의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던 수많은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죽어갔던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죽음을 통해서도 승리를 가져오게 하신다.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영광받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성도들을 보호하셔서 그 악한 상황들을 물리쳐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고난 가운데 놔 두셔서 오히려 고난을 통해 승리를 체험하게 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박해나 고난을 통해 다가오는 마귀의 공격을 이기는 무기는 신실한 기도와 더불어, 결코 굽히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타협하지 않는 신실한 믿음이다. 이런 일들을 통해 성도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다면 그는 마귀를 이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마귀의 공격은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시키는 데에 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주로 대적했지만, 지금의 주된 대상은 역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물론 예언에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대적도 쉬지 않고 있으며, 이 세상 신으로서 세상을 관장하는 그의 역사 또한 여전하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사탄의 역사는 무수하다. 온갖 범죄의 소굴들을 보라. 살인과 음행과 사기 행각들을 보라. 매춘굴과 조직 폭력배와 마약 소굴, 사탄 종교, 마술들, 저질 문화, 심지어 정치판에서의 더러운 일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마귀가 관장하는 일임이 명백하나, 사탄의 가장 큰 관심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그분의 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훼손시키는 것이다. 악한 세상을 관장하는 마귀에게서 벗어나기 원한다면 구원받으면 된다. 구원받고 나서도 옛습관에 얽매여 세상 가운데 있다면 그는 성별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귀의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는 교회를 향해서 더 심한 공격을 퍼붓기 때문이다.
교회를 향한 마귀의 공격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거짓 교리의 유입이다. 신학자나 목사들을 통해 거짓 교리가 유입되면, 그 누룩은 급속하게 퍼져서, 교회는 건물과 교인들은 유지할지 모르지만, 더 이상 순수한 교회로 남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거나, 세례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거나,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치거나, 은사와 기적만을 강조하거나, 주님의 재림을 가르치지 않거나, 죄와 지옥에 대해 설교하지 않거나, 교회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등인데, 오늘날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렇게 행하고 있다. 마귀는 윤리적인 범죄나 박해를 통하지 않고도 교회를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고, 교회를 송두리째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 중에서 마귀의 가장 효과적인 공격은 아무래도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것일 것이다. 연합과 일치가 최고의 이상이 되면, 더 이상 진리를 위한 투쟁은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되며, 교회는 순수성을 잃게 되고, 양 무리가 아닌 동물원이 되며, 결국에는 온 교회가 하나되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특히 두드러지고 있는 사탄의 공격이다.
이러한 마귀의 공격에 대적하려면 무엇보다도 진리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러한 사탄의 공격에 당해낼 수가 없다. 에베소서 6:17에서는 영적 전쟁의 무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다. 이 말씀은 양날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다(히 4:12). 우리는 이 칼로써 견고한 요새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즉『여러 가지 구상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역하여 스스로 추켜세운 모든 높은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케』(고후 10:5)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와 비진리를 가르고, 비진리를 행하는 자들에게 바른 말씀으로 일깨워주며,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거짓 교리들에 오염되지 않도록 성결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으라는 말은 바로 이런 말이다.

그 외에도 사탄은 그의 수하인 악령들을 동원하여 질병을 유발하게 하거나, 정신적으로 혼미하게 만들고, 정신 질환을 가져오기도 한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은 바로 이와 같이 역사하는 악령들을 내어 쫓으신 것이었다. 모든 질병이나 정신병들이 마귀들 때문에 온 것은 아니나, 마귀들림으로 인한 현상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님께서도『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 17:21)고 말씀하셨는데, 어느 정도가 되면 금식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정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다. 요즘에도 “귀신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는 은사주의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표적과 사도들의 표적을 흉내내는 가짜 기적들일 뿐이다. 은사주의자들은 그 마귀들을 쫓아냈다고 하지만, 사실은 마귀들이 그들을 속여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뿐이다. 그 마귀들은 다시금 그에게 들어가고 만다.

이처럼 여러 양상으로 다가오는 마귀에 대해 적절한 무기를 잘 사용함으로써 대적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마귀의 패배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변개된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도 그는 시편의 말씀을 변개시켜서 인용했었다(시 91:11,12과 마 4:6을 비교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분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악령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떨며 물러간다. 이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의 온전한 이름을 붙들어야 한다. 주님의 위대한 권위를 나타내는 이 온전한 이름은 사탄이 절대로 흉내내지 못하는 이름이다. 여기에다 주님을 의지하는 신실한 믿음과 진지한 기도가 더해진다면 능히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마귀를 대적하라는 야고보서 4:7을 다시 한번 상고해 보자.『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 마귀를 대적하기 전에 조건이 있다.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4:8에는 이어서『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 앞에 온전히 복종하며, 지속적으로 그분께 밀착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로 밀착해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그리스도의 피와 그분의 이름과 바른 말씀을 부르짖어도 절대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항상 마귀의 종으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외친다고 마귀가 도망할 것같은가?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도행전 19:13-16에 나오는 스케바의 아들들처럼 마귀들에게 수치만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도 자기의 죄들을 참으로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성령충만을 회복하면 언제라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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