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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연구] 사생활...............펌!
대타자
2006/05/19 23:50 (211.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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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연구] 사생활

[2005-01-13 11:57]  


김정일은 연회를 즐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열릴 때가 많다. 주로 평양에 있는 집무실 옆의 공관에서 열린다. 오후 8시쯤 시작한다.

참석자들은 매번 김정일의 측근 중심이다. 연회장 입구에는 그날의 ‘당번’이 기다리고 있다. 당번의 임무는 들어오는 사람에게 양주를 물컵(맥주컵)으로 한 컵씩 주는 것이다. 입장주다.(신상옥·최은희 비록)

이걸 마셔야 연회장에 들어갈 자격이 생긴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도자(김정일) 앞이라도 취해서 놀아도 된다는 ‘면허’인 셈이다.

술이 거나해지면 김정일이 “(김)용순 동무 노래 한 곡 부르기오”라는 식으로 시킨다. 대부분 남한 노래를 부른다. ‘이별’ ‘하숙생’ ‘찔레꽃’ ‘동백아가씨’ ‘당신은 모르실거야’ 등은 매번 나온다.

김정일도 부른다. 18번은 ‘찔레꽃’ ‘섬마을선생님’ 등이다. 김정일은 ‘백설이 덮인 볼가강으로 달리는 삼두 역마차…”로 시작하는 러시아 민요 ‘삼두역마차’도 자주 부른다.

춤도 춘다. 게임도 하는데, 털깎기도 있다. 게임에서 지면 이발 기계로 듬성듬성 머리를 깎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모자 쓰고 출근한 당 간부는 전날 게임에서 진 사람이다.(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어느 초대소 연회에서의 일이다. 디스코 춤을 추고 있는 다섯 명의 기쁨조에게 술에 취한 김정일이 다가가 “옷을 벗어”라고 명령했다. 무희들이 옷을 벗고 있는데 김정일은 다시 간부들에게 지시했다.

김정일은 “당신들도 같이 춰”라고 했다. 김정일은 또다시 명령했다. “춤을 추는 건 좋은데 만져선 안돼. 만지면 도둑이야”라고 했다.(김정일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은 개인 술 창고도 갖고 있다. 양주 1만병 정도가 들어 있다. 술은 헤네시 코냑을 즐긴다. 북한의 외교관들은 김정일이 좋아할 만한 술을 구해 보내기도 한다.

희귀 음식재료를 구하는 일도 외교관들의 일 중 하나인데 ‘낙타 다리’를 구해 전달한 경우도 있다.(전 북한 외교관) 언젠가는 해군사령부에서 물개를 잡아 해구신을 선물한 적도 있다.

김정일이 먹는 쌀은 평남 문덕쌀, 물은 황해도 신덕샘물이다. 모두 별도로 만들어진다. 특히 쌀이 그렇다. 검정(검사)부 아낙네들이 깨진 쌀, 금이 간 쌀을 손으로 골라낸다.

밥은 백두산 땔나무로 가마솥에 짓는다. 김정일이 산해진미를 즐긴다는 사실을 아는 북한 주민은 거의 없다. 당 선전부는 "장군님은 항일무장투쟁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줴기밥(주먹밥)에 콩나물국, 언 두부를 드시는 혁명가"로 묘사한다.

김정일은 꼭 벤츠 자동차(독일산)를 탄다. 김정일은 차값을 금괴로 결제, 벤츠사 최고고객 중 한 명이다.(이한영) 김정일의 개인소유 차량은 500여대 정도다. 별장 내에서만 사용하는 번호판 없는 벤츠도 적지 않다.

김정일이 주재하는 비밀파티에 참석하는 측근들에게는 문이 하나 달린 소형 벤츠280을 선물한다. 차번호는 모두 216-○○○○.('216'은 김정일 생일을 의미. 뒤 숫자는 3333, 9999 등이다.)

비밀파티가 열리는 날 216으로 시작하는 번호판을 단 벤츠 10여대가 줄지어 평양시내를 달리는 풍경이 목격되는 경우도 있다.(인민군 장교출신) 김정일의 차가 시내를 달릴 때는 일반차량 통행은 금지된다.

벤츠280에는 김정일이 지시한 '옵션'이 붙어 있다. 비밀파티에 참석할 때만 사용하며 반드시 손수 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주민에게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파티 후 귀가하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경우가 허다하다. 이종목(당시 외교부 제1부부장) 김치구(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화영(조직지도부 부부장) 등이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했고, 오진우(인민무력부장)와 노명근(당 재정경리부장) 등은 사고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2003년 갑자기 사망한 김용순(대남비서)의 사인도 교통사고였다는 얘기가 있다. 춤 노래 재담에 뛰어났던 김용순은 비밀 파티의 고정멤버이자 ‘분위기 메이커’였다고 한다.

김정일은 여름이면 수상 오토바이(모터 보트)도 탄다. 91년 압록강에서 김정일은 자신의 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에게 “진짜로 승부를 가리자”며 시합을 요청했다.

이 게임에서 지자 김정일은 한달 후 다시 시합을 갖자고 했는데 그때 김정일은 배기량이 엄청나게 큰 것을 갖고 나왔다.(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이 이겼다.

자동차와 수상 오토바이 외에 오토바이, 승마, 수상스키 등 스피드를 내는 탈 것들도 김정일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그랬다는 기록도 있다.

고교시절에 오토바이를 타고 월북 문인 이기영(성혜림의 첫 시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간 적도 있다.(성혜랑)

김정일이 영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개인 영화문헌고(필름 라이브러리)에는 성우, 번역사, 자막사, 녹음기사 등 250명이 일하고 있다.

필름 1만5000∼2만편을 소장하고 있다. 최근 김정일의 취미 항목에 여성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수중 발레) 관람이 추가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김정일은 사격도 즐긴다. 수준급이다. 몬트리올 올림픽(1976년) 금메달리스트 이호준과 속도권총 1인자 김창호가 사격 개인교사다.

가정생활을 비롯해 이런 김정일의 사생활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선전 매체들은 현지시찰 등을 제외하고 김정일의 얼굴을 자주 내보내지 않는다.

육성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늘 신비스런 인물로 연출된다. 김정일 자신은 “적들이 모르게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은둔’이 아니라 ‘전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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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기쁨조에 대한 이야기 2 사실[2005-08-05 ]


[김정일의 기쁨조 출신 탈북여성 충격고백] "처녀성 검사 최종관문"


북한 기쁨조의 실상이 탈북자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다시 한번 폭로됐다. 일본의 주간지 <주간현대>는 10일 발매된 최근호에서 '김정일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기쁨조의 양성 과정과 역할에 대해 상세하게 다뤘다. 더욱이 보기 드물게 기쁨조 출신 여성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자못 흥미를 끌었다. <주간현대>가 한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에 성공했다는 김선희씨(23·가명)는 지난 99년 약 6개월 동안 중국에서 숨어지내다 2000년 한국에 입국했다. 김양의 부모는 이미 97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김일성 주석과 친척관계여서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양은 5세 때부터 춤과 노래에 재능을 보여 예술 인재들이 모이는 옥류중학교에 진학했다. 15세 때 월반으로 엘리트코스인 평양예술대에 입학, 배우의 꿈을 키웠다. 청초한 얼굴에 늘씬한 몸매로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던 김양이 인생의 전기를 맞은 것은 18세 때였다.

일명 5과(果)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5과는 '중앙당조직지도부간부 5과'의 약칭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서 부대나 다름없다. 요리사 양성과 10여곳에 이르는 별장의 관리, 기쁨조의 양성 등을 담당하고 있다. 기쁨조는 성적인 유희를 담당하는 만족조, 마사지를 전문으로 하는 행복조, 춤과 노래에 정통한 가무조 등 3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장기간의 교육 과정을 통해 전공이 정해진다고 한다.

각지에서 스카우트된 여성들에 대한 기쁨조 테스트는 매년 3∼4차례씩 열린다. 연령은 14∼25세로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 첫번째 관문은 면접으로 사상과 인성을 테스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 친구를 사귄 유무로 한번이라도 이성교제의 경험이 있으면 무조건 탈락된다. 신체 검사는 2차례에 걸쳐 실시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정밀 검사를 받는다. 특히 장기와 비뇨기 검사가 철저하게 이뤄진다.

세번째 관문은 가장 중요한 처녀성 검사. <주간현대>는 "너무 수치스러워 말 할 수 없다"는 김양의 말을 곁들여 "처녀성 검사는 공개적으로 이뤄진다"고 전했다. 기쁨조로 최종 관문을 통과한 14∼15명은 집으로 돌아가 1주일 정도 부모님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평양 근교의 고층빌딩에 위치한 합숙소에 들어간다.

2인 1조로 한방을 쓰면서 생활하고 화장품과 액세서리 등은 합숙소의 매장에서 얼마든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나중에 당 간부들이 일괄적으로 계산을 한다. 약 20개월간의 합숙 훈련 기간 중에는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 교육은 물론 선배들로부터 성 테크닉 기술도 전수받는다. 서양 포르노 비디오를 직접 보기도 한다는 것이 김양의 진술.

연수기간이 지나면 본격적인 당 간부의 호출로 외출이 시작된다. 김양은 같이 방을 쓴 4년 위의 선배가 1주일에 많게는 2∼3번씩 만족조로 불려 나가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큰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김양은 97년 부모의 탈북으로 기쁨조에서 쫓겨났다. 김일성 주석과의 친척관계로 극형을 면한 김양은 산골로 쫓겨나 사람과 가축의 분뇨를 처리하는 곳에서 일을 하다 과로로 입원한 뒤 간호사로 위장해 탈출에 성공했다.

현재 서울에서 평범한 직장 여성으로 지내고 있다는 김양은 인터뷰 말미에서 "북한에서의 악몽을 생각하면 결혼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성의 노예로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일본)〓양정석 특파원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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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기쁨조' 실체 해부

장군님의 특별한 유희 '기쁨조' 실체 해부

[입체해부-김정일의 여자들③] 만수대 예술단 공연조가 핵심

오늘 잠짜리 어느동무를 고를까요....


▲[사진] 만수대예술단 공연조(기쁨조) 캉캉춤 공연  

김정일은 1974년경부터 자기의 측근들과 비밀파티를 가졌다.

당 내 주요 자리를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친위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파티를 이용했던 것이다.

김정일이 여는 파티에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동원되는 여성들을
국내에서 흔히 '기쁨조'라고 부른다.

국내에서 김정일에 대한 잘못된 오해로 들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기쁨조는 조작됐다'는 것이다.

이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거나,
이러한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 인사들의 증언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김정일의 곁에서 사생활을 지켜볼 수 있었던 탈북자 모두는 '기쁨조'가
실재할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자본주의 퇴폐문화보다 정도가 더한
경우가 많다고 전하고 있다. 기쁨조의 모든 면이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쁨조의 존재에 대해서는 북한주민들도 대체로 알고 있다.

주민들은 김일성 김정일의 건강을 관리했던 '만수무강연구소
(現 기초과학원)과 함께
지도자 동지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공연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1997년 북한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은
주로 수요일과 토요일에 여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에서 기쁨조가
나와 흥을 돋운다고 증언했다.

또 지난 1995년 귀순한 무용수 신영희 씨는 자신이
북한에서 기쁨조였다고 고백했다.

신씨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베일에 가려졌던
기쁨조 선발과정, 구성원, 역할 등을 폭로하기도 했다.


기쁨조, 오스트리아 빈에서 탱고, 왈츠, 서양 춤 배워가

외신에서도 기쁨조에 대해 다룬 바 있는데
1999년 9월 오스트리아 주간지 「포르마트」는 “김정일의 기쁨조 여인들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탱고, 왈츠 등 서양 춤을 배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북한의 젊은 여성 6명과 이들을 감독하는 1명의 여인이
빈의 엘마이어 무용학교에서 춤을 배우고 있으며,
이들은 북한의 김정일을 위해 봉사하는 기쁨조 여인들이라고 전했다.

▲[사진]김정일이 기쁨조와 함께 파티를 열었던 8번 연회장 철판구이 코너.

사진 앞에 보이는 희고 평평한 공간이 무대로 활용되는데,
재질 자체가 빛을 발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무대 양쪽 끝부분에 조명장치가 있다.
천장 중앙에는 디스코테크에서나 볼 수 잇는 사이키 조명시설도 갖춰놓았다.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요리사 中)  


기쁨조의 시작은 1970년 초 김정일이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북한 전역에서 미모를 갖춘 여성을 선발해 김일성 별장에 배치하면서 부터다.
1983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김정일을 위한 기쁨조가 생겨났는데
공연조, 희극조, 중주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도 ‘김정일의 여자들’로 불리는 핵심 기쁨조가 공연조이다.
공연조는 만수대예술단에 소속된 무용수들로 구성돼 있다.
북한에서 가장 무용에 능하고 얼굴과 몸매가 예쁜 여자들이다.

희극조는 만담이나 코미디를 하는 그룹이고, 중주조는 파티를 할 때
배경음악을 넣거나 참석자들이 노래를 부를 때 반주를 담당한다.
이름은 ‘백두산7중주단’이다.

중주단은 평양 음악무용대학에서 재능 있는 20대
초반의 여자들을 뽑아 구성한다.

기쁨조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그때그때 충원된다.
충원 대상은 평양을 포함한 전국의 예술전문학교 학생들로
나이는 대개 18세 정도이다. 김정일의 충원지시가 있으면 조직지도부
서기실을 통해 평양시와 도당 간부부로 지시가 하달된다.

이른바 ‘5과 대상자 선발지시’다. 중앙당 5과에서
이 일을 맡아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당국은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만수무강사업은
전체 당원과 당 위원회의 신성한 의무이다>라는 제목의 극비책자를
각 당 간부들에게 지급하고 그 책자의 기준에 의거하여
기쁨조를 물색하여 추천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기쁨조 선발은 중앙당 조직지도부 제5과 담당

5과 대상자는 얼굴이 예쁘고 용모가 단정해야 한다.
각 도에서는 선발지시에 대비해서 미리 예쁘고 건강한 여학생들을
예술전문학교에 뽑아 놓는다.
예술적 소질이 있든 없든 크게 상관없다.

지시가 내려오면 이 학생들 중 골라서 위로 올린다.  

대략 200~300명 정도가 1차 선발되면 이중에서 100명 정도를 추려낸다.
이들은 평양 남산병원에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는데,
이 중에는 산부인과 검진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50명 정도가 최종 선발된다.


김정일의 결재를 받은 50명의 여성들은 선발 후 6개월 정도의 교육을 받게 된다.
‘만족조’는 주연 시중과 성적 봉사에 필요한 예절과 기교를 익히고,
‘행복조’는 물리치료전문의로부터 안마, 마사지, 지압 등의
피로회복 전문기술을 연마한다.
또 ‘가무조’는 주연 시 발휘할 수 있는 노래와 춤 등을 익히게 된다.


특히 ‘만족조’와 ‘가무조’의 경우에는 김정일의 정기주연일인 매주 토요일 밤에
‘자유의 밤’이라는 미명 하에 펼쳐지는 ‘인도의 밤', ‘뉴욕의 밤', ‘도쿄의 밤',
‘페르샤의 밤', ‘파리의 밤' 등에서 의상이나 음악 등 현지 풍습대로
연출이 가능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고 있다.

마지막 교육과정인 보름간의 해외견학교육이 끝나면 이들은 호위총국
소위계급이 주어져 만 25세까지 명목상 인민군 군관으로 복무하게 된다.


김정일의 기쁨조 파티는 그들이 비판하는 소위 자본주의적인 유흥적 분위기를 능가하는
퇴폐적․환락적 분위기를 연출케 한다.

무용수는 팬티가 보일 정도로 다리를 들어올리고 가슴이 보이도록 하여 춤을 춘다.


김정일은 남한노래 ‘나는 못난이’, ‘어제는 비가 내렸네’ 등의
노래를 잘한다고 하는데 춤과 노래가 끝나면 기쁨조는 거의 전라로
김정일에게 술을 권하고, 참석한 간부들은 열광한다고 한다.


퇴폐 향락 분위기 자본주의 능가해

김정일은 기쁨조에 대해 ‘제자리서 뒤로 돌아봐’ 등 갖가지 포즈를 취하게 하면서
이를 즐기는 등 변태적인 행동을 벌인다고 한다.
다음은 김정일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밝힌 기쁨조에 대한 목격담이다.


신천 초대소에서 열린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디스코 춤을 추고 있는 다섯 명의 기쁨조에게
김정일이 다가가더니 느닷없이 명령을 내렸다.

“옷을 벗어!”

무희들이 천천히 옷을 벗고 있는데, 김정일이 다시 명령했다.

“브래지어와 팬티도 벗어!”

이번에는 무희들도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군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마지막 옷까지 전부 벗고서 알몰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자 김정일이 간부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들도 같이 춰”

그는 내게도 함께 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김정일이 또다시 명령했다.


“춤을 추는 건 좋지만 만져서는 안 돼. 만지면 도둑이야.”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의 도움으로 기쁨조 여성과 재혼했다.
그녀는 왕재산 경음악단의 가수이던 엄정녀였다.


▲평양의 8번 연회장에서 기쁨조 출신 엄정년와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는 후지모토 겐지.

이 자리에는 김정일도 참석했다.

기쁨조 여성들은 25세가 넘으면 대개 김정일 주변에서 근무하는
호위군관 및 고위인사들과 결혼시켜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도록 한다.

김정일과 가장 오랫동안 동거하며 ‘정실’
역할을 해온 고영희도 기쁨조 출신이다.


남한에서는 이들이 불쌍한 여자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북한에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

선택받은 여성들인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주위 사람이 기쁨조로
선발되면 누구는 팔자를 고쳤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기쁨조는 평양시 보통강 구역 대타령동의 초호화 아파트에 살면서
일본제품 등의 일용품을 무상 지급 받고 있다. 특히 김정일 동침
여성에게는 오메가 시계 등이 제공되고 부장급 이상의 대우가 제공된다.

이들은 몸이 아프면 부부장급 이상이 치료받는 남산병원을 이용한다.


김정일은 해외여행을 시켜주는 등 기쁨조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기 때문에
이들의 ‘콧대’도 높아진다.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사진] 만수대예술단 공연조에서 무용수였던 고영희

1990년 초 기쁨조를 태운 고려민항 특별기가 모스크바에 착륙했다.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권희경 소련주재 대사를 미롯한
대사관 당비서과 참사관 이상의 고위관리들.

권 대사는 이들이 오기 전에 평양의 조직지도부 서기실에서 보낸
한 통의 친전을 받아놓고 있었다.

“여성 동무들을 외국에 구경 보내니, 소련 구경도 잘 시켜주고 대우도 잘해주시오.

김정일.”

지도자 동지가 보낸 친전이었다.

이 아가씨들은 대사관에서 제공한 벤츠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이튿날 저녁 ‘지도자 동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대사관에서는
최고급의 연회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 날 대사관 직원들은 적잖게 심사가 뒤틀렸다.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애처롭기 그지 없어
이들이 음식을 먹으며 “촌스럽다”, “이것도 먹으라고 차린 것이냐”며
대놓고 면박을 주었던 것이다.
대사관 직원들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들이 돌아가서 ‘지도자 동지’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 여성만 기쁨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백계 러시아 여자, 북구 미인 등도 김정일이 요구하면
일정 기간 ‘수입’한 뒤 미혼인 호위군관에게 하사하거나,
달러를 쥐어 주고 돌려보낸다.


김정일은 지난 30년 동안 자신의 지도체제 강화와 쾌락을 위해
북한 전국에서 미모와 춤, 노래를 겸비한 재능있는 여성을 뽑아
개인의 노리개로 전락시켰다.

물론 그들에게는 북한 주민이 가질 수 없는 특권과 혜택이 부여됐지만
한 인간으로서 삶은 애처롭기 그지 없다.

기쁨조의 존재는 김정일에 대한 역사의 평가에서 가장 치욕적이며
부도덕한 행위로 치부될 것이다.

인간 김정일이 그 어떤 독재자보다 더 비난 받을 소지가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변태적인 엽색행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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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조


기쁨조는 1978년 당 통일전선부의 이동호 제1부부장이 문수초대소에 젊은 여성을 모아 김정일을 접대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후에는 대남사업 담당비서인 허담이 본격화시켰다. 기쁨조 출신 단원들은 한결같이 김정일 취향인 ‘둥근 얼굴에 ‘귀염성 있는 미인’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기쁨조의 기준은 키 160㎝ 이상 몸매가 날씬해야 한다. 그리고 사상성분이 투철한 20세 전후의 미모의 여성이어야 기쁨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일차적 조건이 맞는 사람은 성분조사·성병 등 엄격한 신체검사를 거친 후 일정기간 분야별로 사전교육을 시켜 각처에 배치된다. 기쁨조의 적임자로 뽑히면 당 간부의 자식이라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기쁨조의 구성은 어떻게 나뉘어져 있을까. 기쁨조는 우선 성정쾌락의 도구로 이용되는 '만족조', 안마·마사지 등을 통해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행복조', 반나체무용·노래·악기연주 등을 통해 즐거움을 제공해 주는 '가무조'(일명 율동조)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만족조 요원은 몸매가 특별히 좋고 성정매력이 풍부한 여성으로서 김정일의 비위에 맞는자로 우선 엄선(?)되고 김정일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측근 인사들에게 제공되기도 한다.
행복조는 각 시·도별 30여명을 선발해 안마·마사지 등 실무교육을 시키고 외국에 3개월 동안 실무교육을 시킨 후 각 처에 배치 받는다.
가무조는 보천보전자악단을 비롯, 각 단체 예술단원이나 대학생 중에서 선발, 가무율동을 익히게 한 뒤 배치돼 여흥을 돋우고 술시중도 들게 한다.

한편 기쁨조는 일종의 특혜를 받는다. 김정일은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여성에게는 특별번호를 부착한 벤츠280(일명 공주차)을 제공하기도 하며, 이 차량을 운행하는 기쁨조 요원은 총리나 부장급보다도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25세 이상이 되면 중앙당 간부과에서 소개하는 호위총국 군관이나 국가유공자와 결혼을 시켜 기쁨조에서 벗어나게 된다. 물론 기쁨조에 대한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도록 단속하고 있다
.
기쁨조로 차출된 여성들은 선발과정 후에서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우선 기쁨조로 끌려가도 그 가족들은 감히 불평이나 불만을 털어놓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굶주림에 지친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기쁨조로 선발되면 본인이나 가족들은 살기 좋아진다는 웃지 못할 소문들도 나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딸이 선발되면 가족 모두가 팔자 고친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함흥 출신의 한 기쁨조 여인은 고향에 방문했을 때 "잘 돌봐주라"는 김정일의 친필 서한 때문에 지방당 간부들로부터 깍듯한 예우를 받아 주민들로부터 부러움을 산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기쁨조를 탈락한 여성들은 각 시·도 당 간부들에게 온갖 농락을 당한다.

당 간부는 입당을 시켜준다고 범하고, 행정일꾼들은 좋은 직장에 배치시켜준다고 범하고, 사로청 위원장은 조직생활을 담보해 준다는 핑계로 범해 젊은남자들 사이에서는 "그 다음차례가 우리"라는 은어도 유포돼 있다고 전해진다.
한 사람의 향락과 쾌락을 위해 만들어진 기쁨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김정일의 단죄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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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달 05.21 00:13 ()
김일성하고, 김정일이 개인적으로 이렇게 호화스럽게 사는 돈을 인민들에게 썼으면 최소한 굶어죽고 탈북하는 인민들이 넘치지는 않았을것이다... 지금 우리가 북한 도와줘봤다 이렇게 낭비되거나 군사비로 전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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