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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선 여자되겠다”는 남자…마초인줄 알았는데 침실서 돌변
gregory16
2024/12/21 11:49 (49.1.***.59)
댓글 0개 조회 915 추천 0 반대 0

우람한 몸집에 고기와 술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남자. 사냥과 낚시를 즐기면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남자. 언제나 고함을 질러대며 테스토스테론을 줄기차게 뿜어냅니다. 세상 마초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그릇입니다.

야심한 밤, 집으로 돌아온 그가 침실로 들어섭니다. 그의 표정이 야릇합니다. 그런데 웬걸. 사내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소녀같은 얼굴로 여자를 바라봅니다. 머리를 짧게 올려 친 여인은 이 일이 익숙한듯, 사내를 거칠게 몰아붙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 프랑스 화가 로메인 브룩스가 묘사한 남성적 여성. 1924년 작품. 기사 내용과는 관계 없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 프랑스 화가 로메인 브룩스가 묘사한 남성적 여성. 1924년 작품. 기사 내용과는 관계 없음.남자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침대에 강제로 눕힌 뒤 속옷을 벗깁니다. 이어지는 거친 애정행각. 방안은 어느덧 사내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합니다. 성역할의 전복이었습니다.

‘롤플레이’를 즐긴 사내의 이름은 우리에게도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였습니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있거라’는 세계적 명저를 서술한 소설가이자,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했을 정도의 열정적인 행동가기도 했습니다.

모든 마초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그는 침실에서만큼은 여성이 되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 독특한 취향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다면적인 존재야.” 어니스트 헤밍웨이.

“인간은 원래 다면적인 존재야.”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머니를 극도로 싫어한 헤밍웨이

“이 드레스를 입어, 어니스트.”

1899년 7월 21일. 미국 시카고 서쪽 일리노이주의 부유한 마을 오크파크. 아주 예쁜 남자아이가 태어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였습니다.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가 만든 완벽한 가정에서 자란 모든 걸 가진 아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아들 아니고, 딸이에요.” 헤밍웨이 가족사진. 엄마 그레이스가 안고 있는 아기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1900년.

“아들 아니고, 딸이에요.” 헤밍웨이 가족사진. 엄마 그레이스가 안고 있는 아기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1900년.모든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합니다(톨스토이). 헤밍웨이는 어머니 그레이스를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고함치는 건 다반사, 세상 모든 일에 참견해야 직성이 풀리는 오지랖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레이스는 아들 헤밍웨이에게 누나의 옷을 입히면서 여성처럼 키웠습니다. 타고나기를 마초였던 헤밍웨이와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생각합니다. “엄마와 정반대의 여자를 만나겠다”고. 조곤조곤하고, 언제나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여자. 차분하고 조신하게 물심양면 지원하는 여성. 어머니 그레이스와 조금도 닮지 않은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아들아, 엄마말 똑바로 들으렴.” 헤밍웨이의 어머니 그레이스와 아버지 어니스트 홀.

“아들아, 엄마말 똑바로 들으렴.” 헤밍웨이의 어머니 그레이스와 아버지 어니스트 홀.헤밍웨이는 어머니 그레이스가 심어놓은 여성성을 뽑아내버리려 강박적으로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권투, 육상, 축구, 사냥, 낚시. 남성성을 극대화하는 취미에 탐닉합니다. 그가 유럽에서 일어난 1차 세계대전에 기꺼이 투신한 것 역시 어머니와의 관계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쟁 중 만난 운명적 사랑

모든 소년은 자신을 불멸로 여기는 상상에 빠집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그랬습니다.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무적의 전사처럼 전장을 누빕니다. 그러나 폭탄과 총알에는 눈과 귀가 없어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박격포 공격을 받고 두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습니다. 그때야 그는 깨닫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지근거리에 있는 것이라고.

 “나만큼은 안 다칠줄 알았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크게 다친 헤밍웨이.

“나만큼은 안 다칠줄 알았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크게 다친 헤밍웨이.불행은 달콤한 감미제를 안고 찾아옵니다. 크게 다친 헤밍웨이를 정성껏 돌보던 간호사. 애그네스 폰 크로프스키였습니다. 하얀 간호사 옷을 입고 밤낮으로 그의 상처를 꼼꼼히 봐주는 선의의 천사. 어머니 그레이스와는 정반대의 인물. 헤밍웨이는 사랑에 빠집니다.

7살 연상임에도 그는 그녀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쳤지요. 어쩌면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연상의 여인에게서 찾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그녀만을 기다리는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합니다. 애그네스로부터였습니다.

 “헤밍웨이, 당신은 아직 너무 어려요.” 헤밍웨이의 첫 사랑인 간호사 애그네스.  [사진출처=헤밍웨이재단]

“헤밍웨이, 당신은 아직 너무 어려요.” 헤밍웨이의 첫 사랑인 간호사 애그네스. [사진출처=헤밍웨이재단]“미안해요, 저는 다른 남자와 곧 결혼해요.” 헤밍웨이의 첫사랑은 그렇게 큰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다시는 여자가 먼저 떠나게 하지 않겠다고, 자신이 먼저 여자를 떠나겠다고. 그의 4번의 결혼 생활 중 대부분을 다른 여자에게로 떠난 배경입니다.

파리로 떠난 헤밍웨이

“광란의 20년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돈과 물산이 넘쳐흐르는 시대.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더욱 빈곤에 빠져드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700만명이 죽어버린 1차 세계대전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1차적 쾌락만이 모든 것이라고 외치는 청년들. 이들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이라고 부르던 이유였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1924년 미국 잡지에 발행된 그림. 당시 소비문화를 보여준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1924년 미국 잡지에 발행된 그림. 당시 소비문화를 보여준다.미국의 많은 작가는 부유한 달러를 토대삼아 유럽으로 여행합니다. 예술의 본고장 파리가 특히 주목받았습니다. 헤밍웨이 역시 8살 연상의 아내 엘리자베스 해들리와 함께 파리로 이주합니다. 이곳에서 다양한 예술가를 만나면서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지요.

파블로 피카소, 후안 미로와 같은 거물 화가들뿐만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아일랜드의 대문호와도 술잔을 나눴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의 첫 성공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로 잉태됩니다.

 “해들리, 우리 유럽에서 살자.” 1922년의 헤밍웨이.

“해들리, 우리 유럽에서 살자.” 1922년의 헤밍웨이.

원고지에 묻어난 마초의 향기

헤밍웨이의 마초향은 그의 원고지에도 배어납니다. 하드보일드 문체였습니다. 감성을 최대한 절제하고, 남성의 터프한 필치가 돋보이게 글을 쓰곤 했습니다.

어머니 그레이스와 닮은 남성적 여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묘사도 눈에 띕니다.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브렛 애슐리가 대표적입니다. 걸걸한 선머슴 같은 브렛은 약혼자를 두고도 뭇 남성들과 기꺼이 잠자리를 갖습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헤밍웨이의 여성관이 그대로 담긴 작품으로 통한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헤밍웨이의 여성관이 그대로 담긴 작품으로 통한다.머리는 짧게 올려 치고, 술과 담배를 즐기면서 자기파괴적인 인물이지요. 사회의 도덕을 거부하지만 그 자신의 윤리조차 세우지 못하는 여성. 그래서 시대를 방황하는 방랑자.

여성답지 못한 여성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그립니다. 헤밍웨이가 여성차별주의자 혐의를 받는 이유도 이같은 신여성을 그려내는 방식 때문이었습니다(반대로 브렛을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짧은 머리가 뭐가 어째?” 헤밍웨이는 단발머리 여성을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그리기도 했다. 사진은 1929년 미국 여배우 루이스 브룩스.

“짧은 머리가 뭐가 어째?” 헤밍웨이는 단발머리 여성을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그리기도 했다. 사진은 1929년 미국 여배우 루이스 브룩스.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작가

헤밍웨이는 새로운 욕망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 같았습니다(그는 실제로 사냥을 즐겼습니다). 가정생활이 안정적이 될 때면, 그는 언제나 새로운 여성과 염문을 뿌렸습니다. 엘리자베스 해들리와 유럽에서 여행하던 도중 우연히 한 기자를 만납니다. 폴린 파이퍼였습니다.

 “행복한데, 왠지 불행해. ” 1926년 오스트리아에서 아내 해들리와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행복한데, 왠지 불행해. ” 1926년 오스트리아에서 아내 해들리와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지적이고 우아하면서 아름다웠던 폴린에게 헤밍웨이는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유명 인사인 헤밍웨이였기에 폴린 역시 그를 유혹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언제나 욕망 앞에서 도덕을 잠시 내려놓는 사나이였습니다. 1926년 두 사람은 불륜으로 시작해 이듬해 결혼에 성공합니다.

새로운 결혼은 그에게 새로운 작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폴린이 산고를 겪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무기여 잘있거라’의 여주인공 캐서린을 창조합니다. 긴 머리에 얼굴이 아름다우면서도 남자를 위해 부단히도 희생한 인물. 결국에는 아이를 낳다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비극적 여주인공이었습니다.

헤밍웨이가 숭고하게 여기는 여성상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새 아내 폴린 파이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된 배경입니다.

 “욕망에 솔직해야 글이 잘 써진다네.” 폴린(오른쪽)에게 새장가를 든 헤밍웨이.

“욕망에 솔직해야 글이 잘 써진다네.” 폴린(오른쪽)에게 새장가를 든 헤밍웨이.

전장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다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한 여성만 쳐다보기에 15년은 너무 긴 세월이었습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집니다. 헤밍웨이가 가장 사랑하던 나라였습니다. 기자로서, 또 소설가로서, 무료한 생활을 이어가던 헤밍웨이가 자진해 스페인으로 떠납니다. 그때 그와 함께 간 기자, 미사 겔혼이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여자였습니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을 취재 중인 헤밍웨이(가운데).

1937년 스페인 내전을 취재 중인 헤밍웨이(가운데).두 사람은 스페인 전선을 함께 취재합니다. 공화파가 어떻게 전투하고 있는지, 파시스트 군인 프랑코가 어떻게 공화파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지를 똑똑히 목도했지요.

전 세계서 반(反)파시스트의 가치 아래 모인 3만 5000명 의용군의 영웅적 행보도 취재 대상이었습니다(‘동물농장’의 조지오웰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이를 주제로 쓴 작품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였습니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 역시 미국에서 온 의용군. 그들의 영웅적 희생을 조소하듯 전쟁은 군사적으로 더 잘 조직된 파시스트 국민파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스페인 내전을 취재 중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운데). [사진출처=Cassowary Colorizations]

스페인 내전을 취재 중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운데). [사진출처=Cassowary Colorizations]전장에서 돌아 온 헤밍웨이. 그와 동행인 미사 갤혼 사이에 야릇한 감정이 솟아납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공간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또다시 헤밍웨이는 새 여자를 선택합니다. 그의 세 번째 결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쿠바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불륜으로 헤밍웨이를 쟁취한 폴린은 이제 바람맞은 여인으로 전락합니다.

 스페인 내전기를 녹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스페인 내전기를 녹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진취적인 여성을 싫어한 헤밍웨이

“전 여기서 그대로 머물 수 없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보다 11살 어린 갤혼은 아주 열정적인 저널리스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유럽을 뒤흔들자 그곳으로 직접 가겠다는 열망을 표출합니다. 1943년 연합군의 역습이 시작되면서 갤혼의 의지도 점점 굳어집니다.

헤밍웨이는 반대하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갤혼에게서 그가 그토록 싫어한 ‘어머니 그레이스’의 모습을 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지가 강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헤밍웨이 나는 당신의 부인으로만 남고 싶지 않아.” 1941년 중국 충징에서 갤혼과 헤밍웨이.

“헤밍웨이 나는 당신의 부인으로만 남고 싶지 않아.” 1941년 중국 충징에서 갤혼과 헤밍웨이.갤혼의 열정은 헤밍웨이의 사랑을 모두 태워버립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헤밍웨이도 이제 늙고 점점 지쳤습니다. 1944년 6월 6일, 독일이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 노르망디. 연합군 함대가 연안에 상륙합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유일한 여성, 미사 갤혼이었습니다.

“단순히 헤밍웨이의 세 번째 아내로만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그녀가 노르망디에 발을 디뎠을 때, 헤밍웨이의 마음도 함께 떠나버렸습니다.

 “나치를 끝장내자.” 1944년 6월 6일 아침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미군 병사들. 갤혼도 이때 함께 유럽 대륙에 발을 디뎠다.

“나치를 끝장내자.” 1944년 6월 6일 아침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미군 병사들. 갤혼도 이때 함께 유럽 대륙에 발을 디뎠다.

마지막 사랑 앞에서 변하다

헤밍웨이는 전쟁 취재를 위해 갤혼과 떠나 런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꿰맨 상태에서도 그는 글쓰기에 전념했지요. 그런 그를 옆에서 살포시 보살폈던 여기자가 있었습니다. 메리 웰시였습니다.

이미 두 번의 결혼을 거친 그녀는 경험 많은 완숙한 여성처럼 헤밍웨이를 보듬습니다. 여자를 소유물로 보는 그의 마초적 성향까지 다 이해한다는 듯 품어줬지요. 헤밍웨이가 오랜 시간 찾아 헤맨 여성상이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의 헤밍웨이 하우스. [사진출처=Andreas Lamecker]

미국 플로리다의 헤밍웨이 하우스. [사진출처=Andreas Lamecker]종전 후 두 사람은 쿠바 아바나에 정착합니다. 따뜻한 태양, 사랑스런 (새) 아내, 거기에 돈과 명예까지. 모든 걸 가졌지만 정작 헤밍웨이는 늙고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야심 차게 발표한 소설 ‘강 건너 숲 속으로’는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헤밍웨이도 한물갔다‘는 말이 문학계에 오갑니다. 사나이로서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습니다.

마초적 성향에는 녹이 슬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남성적 여성에게 성적으로 지배받고 싶다는 욕구도 피어 옵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입혀줬던 여성의 옷이 다시 생각납니다. 모든 걸 이해해주는 아내 메리 웰시와 성 역할을 바꿔 잠자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남자는 사냥이지.” 1934년의 헤밍웨이는 거친 취미를 즐겼지만, 노년에는 점점 그의 마초적 성향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사냥이지.” 1934년의 헤밍웨이는 거친 취미를 즐겼지만, 노년에는 점점 그의 마초적 성향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헤밍웨이와 아내 메리. 노년의 그는 성 역할을 바꾸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헤밍웨이와 아내 메리. 노년의 그는 성 역할을 바꾸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이 시기 그가 집필했던 소설 ‘에덴의 동산’에서도 그의 유약해진 성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인공 아내 캐서린 힐은 영리하고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성적으로 개방되고 실험적인 사람입니다. 우연히 만난 마리타라는 여성을 부부의 침실에 초대할 정도입니다.

데이빗은 단순하고 우유부단한 남편이기에 아내의 말에 끌려다니기만 합니다. 기존 헤밍웨이의 작품 속에 마초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이 작품은 헤밍웨이가 죽은 지 20년이 지나서야 발표됩니다).

 헤밍웨이의 에덴의 동산은 그의 변화된 성적 관점이 반영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헤밍웨이의 에덴의 동산은 그의 변화된 성적 관점이 반영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어떤 성공은 실패의 아버지가 된다
1953년 헤밍웨이는 인생의 역작을 완성합니다. 미국의 정신으로 통하는 ‘노인과 바다’였습니다. 84일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낚지 못했지만, 마침내 큰물고기와 만나 힘겨루기를 하는 이야기. 결과가 무엇이든, 자신의 목표를 종교적 구원 삼아 한발짝 한발짝 디뎌가는 서사였습니다. 이 작품 발표 직후인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습니다.

 “낡고 허름한 곳, 인간의 주름이 가득한 곳에서 이야기는 더욱 진해진다네.” 쿠바 해안에서 낚시를 즐기는 헤밍웨이. 1950년.
“낡고 허름한 곳, 인간의 주름이 가득한 곳에서 이야기는 더욱 진해진다네.” 쿠바 해안에서 낚시를 즐기는 헤밍웨이. 1950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듯, 때로 어떤 성공은 실패의 아버지입니다. 노인과 바다의 무게가 후속작의 펜대를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노인과 바다 대성 이후 헤밍웨이는 단 한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글쓰기 동력이 되었던 새로운 사랑을 찾기에도 그는 너무 늙고 병들어 있었습니다. 가족의 핏줄에 섞여 있던 우울의 DNA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1961년 평화로운 여름 날. 그는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1954년 노벨상은 헤밍웨이입니다. ” 노벨상 수상자를 알리는 전보. 이 성공은 그에게 엄청난 중압감이 됐다.
“1954년 노벨상은 헤밍웨이입니다. ” 노벨상 수상자를 알리는 전보. 이 성공은 그에게 엄청난 중압감이 됐다.
마초이자, 성 역할의 전복을 꿈꿨던 남자. 어머니를 증오했지만, 결국 어머니와 비슷한 역할을 아내에게 주문했던 소설가. 위대한 예술가는 한 단어로 규정되지 않는 다면체의 총합이라는 걸 헤밍웨이가 보여준 셈입니다.

 1923년 헤밍웨이 여권사진.
1923년 헤밍웨이 여권사진.
<네줄요약>

ㅇ마초적 작가로 유명한 헤밍웨이는 끝없는 바람으로 네 번이나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ㅇ어렸을 적 거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기억 때문에 그는 진취적인 여성을 혐오하기도 했다.

ㅇ나이가 들면서 이런 마초적 성향에도 녹이 슬었는지, 그는 아내와 성 역할을 바꾼 잠자리를 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ㅇ인간은 단순하지 않다는 걸 헤밍웨이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gregory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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