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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이유
임진왜란 때 필자의 12대 조부님 괴암 朴鳳祥 선무원종2등공 할아버지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사천리 전투에 이어 영천성 복성 전투에 공을 세웠다. 할아버지의 자손이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와 선천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번창하게 살아왔지만, 할아버지께서 당시 살아남지 못했다면 우리도 지금 세상에는 없는 몸이다. 만약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인구가 아마도 일본을 능가했으리라 짐작해본다. 더구나 일제 36년 강점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우리 민족을 전쟁터로 내몰아 수많은 사상자 피해를 냈다. 역사를 다시 상고해보면 삼국시대 왜구들의 노략질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잡혀갔다. 400년 전에 한 사람의 죽음은 1세대 30년으로 쳐도 한 사람이 평균 3명의 자식을 키운다고 보면 얼마의 인구일까? 필자의 경우 실재 12대지만 평균치로 400년을 한세대 기간 30으로 나누어도 13대가 된다. 우리 12대로 내려온 자손이 현재 모두 177,147명 누적계산이다. 내 아들 형제까지 내려 계산하면 이 숫자에 3을 곱하면 모두 531,441명이 된다. 즉 임진왜란 당시 한 사람이 죽을 경우 지금에 와서 177,147명의 인구가 감소했다는 계산이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나 함이 숫자로 명확하다. 우리나라는 대마도 왜구를 소탕한 외에 한 번도 일본 본토를 다친 일이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승지로 사천리 전투 승리는 육지에서는 초기의 승리다. 사천리는 지형상 금호강을 건너야 하는 조건과 강을 건너면 바로 언덕이라 높은 지역에 위치한 사천리 마을이다. 높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개미 때처럼 강을 건너는 왜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병들의 무기라야 활이므로 주로 화살로 무찔렀다. 의병들이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숨어 있다가 적의 도강을 마치자 기습하여 화살 세례로 몰살시키듯 승리한 전투였다. 청송방면으로 향하던 왜적의 선발대가 사천리 전투에서 예봉이 꺾이자 북상의 속도가 멈추어지고 사기가 크게 떨어진 일이다. 그들은 신무기인 조총도 한 발 제대로 사용도 못 하고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 사천리 전투 승리는 영천성 복성전투에도 영향이 매우 컸다고 말할 수 있다. 화산공 권응수 장군의 의병소속인 괴암공 할아버지는 사천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숙부인 할머니 묘소도 화남초등학교 뒷산이고 괴암공 묘소는 화남면 죽곡리에 안장되었다. 당시 관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나 의병들은 내 고장 내가 지켜야 한다는 자부심에 불타고 있었다. 백성들도 왜놈을 피해 피난 가기 바빴지만, 의병들의 용기를 믿고 너나없이 도움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무기란 총 대신 활이었다. 화약을 사용하는 신무기 조총을 든 왜놈을 당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함에도 직접 대적하고 싸운 기개는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중국에 비하면 조그만 강토에 신무기 조총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저질러진 참혹한 전쟁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기간도 너무나 지겹게 7년을 할퀸 상처투성이다. 농사와 양식이 국토와 함께 초토화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기 바쁜 피난 생활이 7년을 기름 짜는 압착 틀 속에 갇힌듯한 고통이었다. 왜놈들이 못 찾아올 심산계곡 험난한 길을 찾아 떠나기 바쁘고 자기 생명 지키기에 다급했다. 전쟁통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정감록의 십승지란 곳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양식이 없으니 먹을 것이라곤 쑥 종류의 풀과 나무껍질이다. 총에 맞아 죽는 일 피하는 것보다 굶어서 연명하기가 너무 힘든 나날이다. 쌀에도 오늘날과 같은 수량과 품질이 나온다기보다 수확량이 너무 미약해 메추리 두 마리 왔다가 먹을 게 없어 한 마리는 울고 간다는 말이다. 요즘 들판에 자생하는 자연산 곡식을 거두어도 당시의 농사보다 훨씬 좋다는 말이다. 의복도 자가 제작하던 시절이라 길쌈을 땅에 기르고 만들고 짜고 하는 일들은 과연 어떻게 감당했는지 피난 생활에서 그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일본의 미친 임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 때문에 우리 민족의 생명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당했을까 알아보았다. 7년 전쟁을 겪고 난 조선 땅을 자세히 살펴보자. 임진왜란 직전의 인구가 1,400만 명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230만 명이라고 한다. 인구의 16.4%가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순전히 왜놈들의 침략으로 아까운 목숨이 사라진 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식은 그렇게도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생명은 파리목숨 보다 가벼이 여겼다니 말이다. 일본이 항상 대륙을 탐내는 기질이 아직도 일본 위정자가 갖고 있음을 느끼는 일이다. 아직도 총리라는 놈은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다시 한국의 침략을 위한 근거마련으로 침략수단에 걸치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은 장래 지진으로 피폐해지고 못쓰게 될 땅이라 미리 알아차리고 대륙점령을 위한 포석을 던지고 있다. 일본은 천벌을 받아 지진으로 물속에 수장당해야 싸다. 그래도 일본인을 물속에서 건져 살려낼 사람은 한국인이다. 일본의 지난 쓰나미 사건은 새 발의 피다. 다가올 쓰나미 사태는 지구 지질학의 미래에 이미 결정된 상태다. 바다 위를 떠다니며 헤매는 일본인을 건져 올릴 한국 사람들이 살려낼 일은 역사가 이미 준비되고 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건져낸다.
임진왜란 당시 12대조 괴암공 할아버지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 전쟁으로 죽었다. 그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처럼 살아있다면 지금 그의 후손도 177,147명일 것이다. (1대 3명으로 12대 누적 계산) 한 대에 세 사람 자식을 갖는다고 한 계산이다. 2.5사람 정도로 계산하면 좀 더 낮은 숫자가 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망자가 230만 명이면 한 사람당 177,147명 하면 지금의 일본 인구보다 우리의 인구가 월등히 더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구를 지금과 같이 축소시킨 원인은 임진왜란이고 전쟁을 일으킨 원흉도 일본이다. 엄청난 전쟁 참화로 인구소멸의 피해를 만든 일이다. 이런 일본은 아직도 전범자로 회개하지 못하고 한국의 재침략을 위한 전쟁유발 씨앗을 독도로 매기고 있음은 통탄할 일이다. 일본이 아무리 평화를 위장한 우호 외교를 편다고 해도 우리 민족은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진정한 마음을 다시 갖추고 뉘우치는 모습을 진심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일본은 침략야욕의 그림자가 그려진 마음을 갖고서야 어찌 평화공존의 국제사회 일원이라 하겠나 말이다.
( 글 : 박용 2018.08.31 )